요즘 섬진강은 매일 다른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광양에서 시작된 벚꽃이 어느덧 섬진강에 이르고 개나리, 진달래 등 다양한 수종의 화려한 꽃들의 향연과 섬진강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운 그 자체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을 오문수 기자가 걸으면서 감성을 전하고 있다. /편집자주
▲ 섬진강댐으로 인해 수량이 줄어들어 생긴 침실습지 모습으로 안정적인 수변생태계와 서식환경을 갖추고 있어 멸종위기종인 수달과 흰꼬리수리, 남생이를 비롯한 665종의 다양한 생물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가 되었다. ⓒ 오문수 ©金泰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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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발원지부터 강변을 따라 걷던 내 발길이 드디어 고향인 곡성에 이르렀다. 내가 섬진강 종주를 선택한 건 내 핏속에 섬진강물이 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경치 좋고 살기 좋은 곡성에는 효녀 '심청전'에 얽힌 설화가 전해오는 마을이 있다. 또한 1996년에 방영된 역사 드라마 <용의 눈물>과, 2000년도 방영되었던 <태조 왕건>에서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었던 마천목 장군이 살았던 곳도, 신숭겸 장군이 태어난 곳도 곡성이다.
▲ 도깨비마을 입구에 선 조각상 모습 ⓒ 오문수 ©金泰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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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변에서 만난 사람들
오전 10시경, 배낭 하나를 짊어지고 금지천변 제방위에 섰다. 2년 전 섬진강 대홍수를 겪은 상처가 아물지 않은 금지천변에는 아직도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저러다 큰비가 내리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앞선다.
섬진강 인근 제방을 따라 남원에서 내려오는 요천수가 합류하는 남원시 송동면 세전리 인근에는 물막이보가 설치되어 있고 깊은 물웅덩이 인근에서 낚시꾼들이 고기를 잡고 있었다.
"은어 잡습니까?" 하고 묻자 "아니요! 잉어 잡았어요"라는 답변을 해 허락을 받고 낚시꾼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니 팔뚝만한 잉어를 보여줬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다는 그와 대화를 나눴다.
▲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고려인 후손 이알렉스씨가 섬진강에서 잡은 잉어을 들어보이고 있다. 11년전 한국에 온 그는 광주에 있는 형틀공장에 근무하며 전가족이 함께 살고 있다. ⓒ 오문수 ©金泰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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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왔고 강물에 서서 고기 잡는 저 친구는 키르기스스탄에서 왔어요.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 공항에서 근무하다 한국에 온지 11년째이고 광주에서 형틀작업 공장에 근무하고 있어요. 낚시가 취미라 휴일에는 가끔 옵니다. 아내 두 아이를 포함해 전가족이 광주에 살고 있어요."
우리와 똑같은 얼굴과 말투를 지닌 고려인 후손이 잘되기를 빌며 "열심히 사세요"라고 격려한 후 조금 더 내려가자 노부부가 논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건너편 큰 노송들이 우거진 동산이 눈에 익어 어르신에게 "동산리가 어디쯤이죠?" 하고 묻자 "바로 저 건너인데요"라는 답변을 해 김용길(73)씨와 대화를 나눴다. 동산리는 곡성중학교 학생들이 봄 소풍을 가던 장소이기 때문에 몇 번 가본 곳이다.
▲ 남원시 송동면 세전리 인근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김용길(73세)씨가 건너편에 보이는 동산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오문수 ©金泰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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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섬진강·요천수·수지천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엄청나게 큰 모래사장이 펼쳐졌고 여름철에는 하루에 1000명씩 모래찜질하러 왔던 곳이에요. 동산리까지는 줄배를 타고 다녔죠. 어릴적 동산리에서 목욕하고 나면 동네 선배들이 장난치느라 팬티를 숨겨버려 동네어귀까지 발가벗고 갔던 추억이 있는 곳입니다. 2년 전 수해 때 제방이 터져 낮은 집에 물이 들어와 우리집 안방에도 물이 50cm까지 차올라왔어요."
서울에서 사업하다 95세 노모가 계신 고향으로 귀향했다는 그에게 "서울살이와 시골살이의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해달라"라고 하자 "어디 살든지 노력하기에 달렸어요. 욕심을 버리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라며 인생철학을 말했다.
자전거도로를 따라가면 '둥둥' 소리가 난다는 둥둥바위가 있다. 한없이 평화로운 모습의 이 바위가 유명해진 것은 영화 <곡성> 촬영지이기 때문이다. 일본배우 쿠니무라 준이 바위에 앉아 낚시를 하는 장면으로 연결되며 앞으로 전개될 심상치 않은 사건들을 예고한 둥둥바위 뒤편에는 '횡탄정'이 있다.
횡탄정 인근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자전거 동호인 6명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 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2년만에 국토종주·백두대간·4대강의 자전거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자전거 매니아들이다. 부산에서 왔다는 리더 문인성씨와 대화를 나눴다.
▲ 부산에서 온 자전거 동호인들로 2년만에 국토종주 백두대간 4대강을 돌아본 자전거 매니아들이다. 이들이 서있는 바로 뒤 바위가 '둥둥바위'로 영화 <곡성>에 나오는 바위다 ⓒ 오문수 ©金泰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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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고 다녀보면 지역의 특징과 강원도의 높고 깊은 계곡, 암반지역을 볼 수 있어요. 돌아다니면서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어렵게 살았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6명이 함께 다니지만 한 사람이라도 마음이 안 맞으면 안됩니다."
"한국의 산하에 대해 한마디로 요약해달라"고 부탁하자 "너무 아름답습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하류로 내려가자 내고향 오지리와 고달리를 잇는 철제 수중교가 나온다.
내 어릴적 이곳에는 나룻배와 뱃사공이 있었다. 초저녁 밤이면 "어이~ 사공! 어이~사공!"하는 사공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고달쪽 백사장 움막 속에서 기다리던 뱃사공이 배를 저어 마을 사람들을 건네주던 곳이다.
▲ 내가 태어난 오지리에 사는 선후배 동네분들이 시냇가에 마련된 파크골프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다. 팔 다리 머리까지 써야하는 전신운동이라고 한다. 파크골프는 요즈음 시골에 가면 나이드신 분들이 하는 운동으로 대세가 됐다. ⓒ 오문수 ©金泰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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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집에서 1박을 한 후 아침 일찍 내가 방문한 곳은 침실습지다. 곡성읍 동산리에서 오곡면 침곡리에 이르는 여의도 면적 80% 정도에 해당하는 광활한 강습지다.
내 어릴적 이곳은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백사장이 펼쳐지고 목욕하던 발밑에서 팔꿈치 크기의 모래무지가 잡히던 곳이었지만 섬진강댐이 생기면서 수량이 줄어 습지가 되었다.
55년 전 처음으로 전기와 스피커가 설치한 계기가 된 곳
멀지 않은 곳에 내 중학생 시절 깊은 추억을 남겼던 냇물이 보인다. 내 중학교 시절이니 아마 1960년대 말쯤 일어난 일로 기억된다. 가을걷이가 한참인 어느 날 초저녁, 곡성평야인 '한들'에서 리어카에 벼를 가득 싣고 집으로 가려면 곡성읍에서 섬진강으로 흐르는 냇물을 건너야 했다.
물은 얕지만 모래와 잔자갈이 깔린 냇물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주치는 최대 난관이다. 순식간에 냇물을 건너지 못하면 모래속에 바퀴가 빠져 옴짝달싹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앞에서 끌고 바로위 형과 나는 거의 70도 각도로 뒤에서 힘껏 미는데 물속에 반짝이는 게 보였다. 물을 건넨 후 신발속에 들어간 모래를 털고 집으로 향하려할 때 내가 아버지한테 말을 걸었다.
▲ 55년전 가을걷이를 한 후 리어카에 볏단을 가득 싣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금시계를 주웠던 괴냇물 모습. 지금은 다리가 놓였지만 당시 리어카에 짐을 싣고 시냇물을 건너기 위해서는 급경사진 언덕 쪽에서 힘차게 달려야만 시냇물을 건널 수 있었다. 땅만 보며 온힘을 다해 리어카를 밀던 중 물속에 떨어져 있던 급시계를 주웠던 자리다. ⓒ 오문수 ©金泰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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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서 온 자전거 동호인들이 구름다리를 건너내려오고 있다. 리더인 이병종(59세)씨에 의하면 "4대강 중에서 섬진강이 가장 아름답다"고 말했다. ⓒ 오문수 ©金泰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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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물속에 금붕어가 있는데요."
"강물에 어떻게 금붕어가 산다냐. 말도 안 돼. 그래도 궁금하면 한 번 가봐라."
반짝거리는 물건을 본 현장에 되돌아와 내가 주운 건 선생님들만 차던 시계였다. 주머니에 시계를 넣고 개울가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데 동네에서 최고 부자인 안씨네 머슴 둘이서 횃불을 들고 땅바닥을 샅샅이 살피며 "혹시 금시계 못봤어요?"라고 물었다.
집에 돌아와 저녁밥을 먹은 식구들은 내가 주운 시계가 머슴들이 찾는 금시계인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고 아버지와 함께 부잣집으로 갔다. 안씨네 넓은 마당에는 머슴들과 이웃 사람들까지 동원되어 전기불을 켜놓고 산더미같이 높이 쌓인 볏단을 풀어헤치고 있었다.
시계를 되돌려주자 감격한 그분은 손을 덥석 붙잡으며 "그 금시계는 논 열 마지기 값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라며 감격해 했다. 당시 우리 집 재산은 논 네마지기가 전부였었다.
다음날 호롱불만 켜던 우리 집에는 전기불이 들어오고 스피커가 설치돼 비록 오후 5시부터 저녁 9시까지만 들리는 방송이지만 매일 라디오를 들을 수 있었다. 금시계 주인인 안씨가 설치해준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금시계를 돌려준 인연으로 매년 추석과 설날이면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던 소고기 선물을 보내주셨다. 정직하면 보답이 돌아오는가 보다. 어느 여름날 "원두막에서 주무시던 아버지가 피를 토하고 계신다"는 이웃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를 리어카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안씨를 만났다.
우연히 대문간에 서계시다 리어카에 누워계신 아버지를 본 그 분은 깜짝 놀라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따뜻한 아랫목에 눕히고 따뜻한 물만 흘려 넣어 주고 있는데 왕진의사가 집에 오셨다.
그분이 보내주신 것이다. 처방을 내려주고 약까지 준 의사는 "까딱했으면 큰일날 뻔했습니다. 급체였어요" 금시계를 돌려준 것이 아버지를 살린 셈이다.
55년만에 찾은 현장에는 사람과 자전거만 다닐 수 있는 다리가 놓여있었다. 성실하고 근면하면 언젠가는 보답이 돌아온다는 금시계 사건은 우리 집안에 흐르는 전통이 됐다.
▲ ▲ 곡성기차마을과 가정역을 오가는 추억의 기차는 국민들로부터 곡성을 사랑받도록 한 계기가 됐다. 매년 5월이면 개최되는 곡성장미축제와 더불어 곡성의 랜드마크가 됐다. ⓒ 오문수 ©金泰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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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일이면 가정역 인근 곡성군청소년야영장에 캠핑족들이 모여 섬진강을 즐긴다 ⓒ 오문수 ©金泰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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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니 반대쪽 도로 위로 옛날 기차가 관광객을 싣고 달리고 기적소리를 울리며 달리고 있었다. 기차마을과 함께 장미축제가 열리는 5월이면 기차마을 인근은 경향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몰고 온 승용차로 몸살을 앓고 있다. 성공한 도시재생사업의 본보기가 된 셈이다.